제 목 : 변질(變質) | 조회수 : 919 |
작성자 : 김종훈 | 작성일 : 2020-07-31 |
‘변질’(變質)이란, ‘사물의 모양이나 성질이 변하는 것’을 뜻한다. ‘변화’(變化)란 말 역시도 이와 비슷한 뜻을 가진다. 하지만 실제 용례(用例)에서는, ‘변질’은 좋은 것이 나쁘게 변하는 것에 주로 쓰이고, ‘변화’는 부족한 것에서 만족한 상태로 변하는 것에 주로 쓰인다. 예를 들어, “며칠 전만 해도 맛있게 먹던 국인데, 오늘 보니 벌써 변질되어 쾨쾨한 냄새가 나서 못 먹게 되었다”든지, 아니면 “아무개 성도는 처음 교회를 찾아 왔을 때에 비하면 정말 많이 변화되셨다”라든지, 이런 식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 이렇게 변화만 되어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변화를 지켜보는 나도 남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오히려 변질되어가고만 있는 것 같으니 슬프다.
얼마 전 갑자기 우유가 마시고 싶어 마트에서 사 와서 정말 시원하게 벌컥벌컥 들이켰는데, 절반이 남아 냉장고에 넣어두고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런데 어제 다시 그것을 발견하고는 꺼내어 뚜껑을 열어보니, 벌써 역겨운 냄새가 나지 뭔가? 물론 날짜도 한참 지났고... 그래서 그 아까운 절반을 그냥 버려버렸다. 아니 그렇게 며칠 전만 해도 시원하고 달콤했던 우유가 왜 어느 날 갑자기 못 먹을 우유, 버려야 할 우유로 변질되었나? 그동안 냉장고는 뭐 했고, 나는 또 왜 잊어버렸나? 이래저래 속상하였다.
하지만 음식은 그렇다 치자. 안 먹으면 되고, 새로 사 먹으면 된다. 앞으로 주의하면 된다. 그런데 사람 변질되는 걸 보는 건 정말 속상하고 안타깝다. 그렇게 겸손했던 사람이었는데 어느새 교만해져 버렸다. 그렇게 착했던 사람이었는데 어느새 악해져 버렸다. 그렇게 충성했던 사람이었는데 어느새 나태해져 버렸다. 그렇게 순진했던 사람이었는데 어느새 교활해져 버렸다. 처음엔 그렇게 잘해보겠다며 손들고 만인 앞에 맹세까지도 했는데, 지금 보니 언제 그랬냐는 듯 싹 잊어버렸다. 너무 안타깝고, 너무 속상하다. 그렇다고 그를 버릴 수도 없고, 새로 살 수도 없고... 아~ 도대체 왜들 그런가?
하여 나 역시도 그게 제일 두렵다. 어쩌면 지금 가장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적(敵) 역시도 그것이다. 변질되지 않으려고, 못 먹을 우유처럼 되지 않으려고 오늘도 또 발버둥 친다.
이는 아마도 지금으로부터 27년 전, 어느 권사님이 해주신 말씀 때문일 수도 있다. 막 중위 계급장 달고 첫 군목사역을 진해(鎭海)에서 시작했을 때, 어느 날 구치소 예배를 끝나고 나온 주차장에서 차에 막 오르려는 나를 붙들고 해주신 느닷없는 말씀. “목사님. 지금 목사님의 모습이 저는 너무 좋은데, 이 다음에 큰 목사님이 되시더라도 이 모습은 변치 말아 주세요.”
도대체 왜 나한테 그 소리를 그때 그 권사님이 했는지는 모른다. 그냥 내 추측이라면, 아마도 주변에 여러 목회자들을 지켜보아 온 안타까움에서였을 수도 있을 터. 아무튼 그 말씀은 지금도 생생하여 나를 붙든다.
몇 년 전, 문득 다시 그 권사님 생각이 나서 전화로 “그때 왜 그 말씀을 내게 했냐” 물었더니, 그 말씀을 당신은 기억도 못하시더라. “그런 무례한 말씀을 제가 드렸느냐”며 오히려 “죄송하다”고까지 하시더라. 하지만 난 “아니라” 했다. “권사님은 그걸 기억 못 할 수 있고, 그냥 던진 말씀일 수 있지만, 난 그걸 지금도 생명처럼 붙든다” 했다.
더운 여름이다. 올해는 긴 장마로 습도도 많아서 하마터면 음식이 잘 변질될 시기이다. 어쩌면 이 시대 또한 그럴 수 있다. 유혹의 여름, 고난의 장마 또한 길고 거세다. 정신 안 차리면 내 신앙, 내 인격도 쉽게 변질될 때다. 그러니 부디 말씀과 기도, 예배와 찬양으로라도 다시 무장하여 나의 변질을 막자. 변질을 멈추고 변화로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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