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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영상  Weekly Sermon

담임목사 칼럼  Pastor Column

‘생각 많은 사람’ vs ‘고민 많은 사람’
‘생각 많은 사람’과 ‘고민 많은 사람’. 어느 날 문득 그차이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얼른 국어사전부터 열었더니, ‘생각’이란, ‘헤아리고 판단하고 인식하는 것 따위의 정신 작용’이란다. 그렇다면 ‘고민’은? ‘고민’은 ‘마음속으로 괴로워하며 속을 태움’이라 되어있었다. 그러니 이렇게 단순비교만 해봐도 답은 나온 것 같다. 생각은 좋은 것이지만, 고민은 나쁘다는 결론이다. 생각이 많은 건 좋지만, 고민이 많은 건 좋지 않다는 얘기다. 왜일까? 내 경우도 늘 그랬다만, ‘생각’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는 것이기에 생각의 목적과 결과가 대부분 긍정적이 되더라. 하지만 ‘고민’은 뭔가를 해결하지 못해 끙끙 앓느라 아무 진척도 없는 상태이기에 고민의 목적과 결과는 부정적일 때가 많았다. 그래서 생각이 쌓이면 해결로 나아가지만, 고민이 쌓이면 병이 된다. 생각은 해결책을 명쾌하게 만들지만, 고민은 문제를 더 꼬이게 만든다. 생각이 많으면 복잡했던 것도 단순화시킬 수 있지만, 고민이많으면 단순한 문제마저더 복잡하게 만든다. 생각의 결과는 선택지가 하나로 모아지지만, 고민의 결과는 오히려 선택이 여러 갈래로 찢어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고민이 깊어지면 심지어 꿈에까지 나타나 날 괴롭히지만, 생각이 깊어지면 그것으로 다시 미래의 꿈도꿀 수 있다. 그래서 생각은 건설적이고, 고민은 파괴적이다. 생각은 나를 건져내고,고민은 나를 빠뜨린다.생각은 할수록 아이디어가 떠오르지만, 고민은 할수록 아이디어는 사라진다. 아, 그래서 성경에도 ‘생각하라’는 구절은 있어도 ‘고민하라’는 구절은 없나 보다. 오히려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한다”(잠 17:22)고 경고할 뿐이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마 6:27)며 안타까워할 뿐이다. 그러니 고민하기보다는 생각하며 사는 게 훨씬 좋겠다. 첫째는 ‘예수님’ 생각.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 그러면 마음에 위로와 소망, 기쁨과 용기도 생긴다. 둘째는 ‘말씀’ 생각.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딤후 2:7). 그렇다. 성경 말씀만큼 우리에게 지혜와 능력을 물 붓듯 부어주심이 또 어디 있나? 베레아 사람들처럼 들은 말씀을 날마다 생각하는 사람이 신사적(gentlemanlike)이 된다. 셋째는 ‘나의 허물’ 생각. 문제가 생기면일단은 나부터 돌아보는 것이다. 그래서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전 7:14)고 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계 2:5)는 말씀은 언제나 금과옥조(金科玉條)여야 한다. 넷째는 ‘받은 은혜’ 생각.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의 전 가운데에서 주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였나이다”(시 48:9). 그래서 ‘생각’(denken/think)은 ‘감사’(danken/thank)라는 단어와 같은 어근도 가졌다. 다섯째는 ‘기도할’ 생각. 이는 두말하면 잔소리.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그러니 고민하지 말고 생각하자. 기도하자. 바르게 생각하고 기도하면서 문제를 해결해가자. 괜히 고민하고 우울해져서문제까지 복잡하게 만드는 건 너무나 어리석고 피곤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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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머리의 미학(美學)
내가 몸살 기운이 있어 동네병원을 찾았다가 진료실 앞에서 기다리던 중, 데스크의 간호사로부터 “아버님 들어가세요”라는 소리를 듣고 첫충격을 받았던 때는 세교성전 입당 후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러니 족히 9년은 넘은 것 같다. 아니 도대체 그 간호사는 날 뭘로 보고 ‘아버님’이라 했을까? 난 그 간호사 같은 며느리를 둔 일이 없는데... 아직 사위 볼 날도 멀었는데... 그래봐야 내 나이 40대 중반이었는데... 그냥 "000님" "선생님" "환자분"이라 해도 될 것을 왜 굳이... 그래서 한번 따질까도 싶었지만억지로 참았다. 하여간 그때 그 간호사가 던진 한마디로 내 몸살 기운은 더 심해졌다. 게다가 그 말은 그 일이 있기 얼마 전, 주일예배 때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함께 탄 어느 성도가 “어머, 이제 목사님도 흰머리가 보여요”란 말에 이미 비슷한 충격을 한번 받은 상태였다. 물론 “예배당 짓느라 많이 힘드셨나봐요”라고 금방 위로의 말씀으로 수습은 하셨지만, 그래도 내겐 그 뒷말보다 앞말이 더 남았었다. 그랬던 내가, 10년이 지난 지금. 지금은 이 현실을 너무 잘 받아들이고 있다. 이젠 내 머리 얘기를 누가 해도 끄떡없다. “아 그래요?”로 응수한다. ‘중후해 보인다’는 의미로 재해석해버린다. 어딜 가서 “아버님” 소리를 들어도 괜찮다. ‘푸근해보인다’는 의미로 재해석해버린다. 왜 이렇게 생각이 바뀌었냐고? 물론 나이도 그만큼 더 먹어서이다. 또 불가항력적인 건 빨리 받아들여야 마음도 편해서이다. 게다가 최근엔 ‘사람의 백발이 신비로운 신체작용’이라는 것도 알게되어서이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백발(白髮)은 병적인 이유를 제외하고는 인체가 에너지를 절약하는 차원에서 취하는 고마운 표시란다. 다시 말해 신체의 다른 부분을 젊게 유지시켜 주려고 머리털을 대신 노화시킨다는 원리다. 사람은 에너지 소모가 격렬해질 경우, 그것을 어디선가 보충을 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되면 불필요한 세포 분열을 하게 된단다. 그래서 신체의 어느 부분을 희생시켜서라도 그걸 막아보려 애쓰게 되는데, 그중 하나가 머리카락을 희게 만드는 거란 얘기다. 그러니 백발은 나의 노화를 조금이라도 줄여주기 위한 희생의 발로인 셈이다. 캬~ 이런 고마울 데가... 게다가 성경도 “백발은 늙은 자의 아름다움”(잠 20:29)이라 하지 않았나? “영화의 면류관”(잠 16:31)이라 하지 않았나? 고로 백발을 가졌다는 건 장차 받을 면류관도 잘 준비되고 있음의 증거이다. 그래서 난, 안셀름 그륀(Anselm Grun)이 ‘황혼의 미학’에서 ‘나이 드는 기술’에 대해 말한 것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는 첫째, ‘받아들이는 것’이 나이 드는 기술이라 했다. 즉, 신체의 변화를 굳이 외면하거나 감추지 않는 것. 그렇게 한계를 인정하고, 과거와도 화해하고, 고독을 다루는 법도 익혀가는 것이라 했다. 둘째는 ‘놓아버리는 것’이라 했다. 가진 것에 집착 말고, 관계에 느긋해지는 것. 성(性)에서 자유로워지고, 권력도 내려놓는 것. 왕년에 내가 어떤 사람이었건 그 과거의 영광과는 거리를 두고, 섭섭함도 내려놓는 것. 재산이나 지위 또한 ‘없어졌다’ 여기지 말고, ‘물려줬다’ 여기는 것. 왜? 나도 젊었을 때 누군가가 물려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살았을 테니까. 셋째는 ‘넘어서는 것’이라 했다. 자아를 버리고, 나보다 더 큰 어떤 것에 마음을 여는 것. 나의 공간을 비워 하나님으로 채우는 것. ‘추월’이 아닌 ‘초월’의 삶을 사는 것이라 했다. 정말 지혜롭고 깊은 통찰이다. 그러니 혹 당신에게도 ‘백발’(白髮)이 시작되었다면, 감사하고 받아들이고 놓아버리고 넘어서라. 거기에 ‘선량함’과 ‘부드러움’, ‘너그러움’과 ‘침묵’, ‘내적 고요’와 ‘하나님과의 일치’까지 더해간다면, 당신의 백발은 더없이 찬란하고 아름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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