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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영상  Weekly Sermon

담임목사 칼럼  Pastor Column

예배에 지각하는 문제
지금부터 하는 제 얘기는 꼭 맞는 얘기는 아니니 흘려들으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영 틀린 말도 아니니 완전 무시는 마시기 바랍니다. 다름 아니라,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보면 매학기 늘 반복되는 현상들이 있는데, 하나는 강의 시간마다 결석을 자주하는 학생들입니다. 또 참석은 해도 늘 지각을 밥 먹듯 하거나, 제일 뒷자리에만 앉거나, 매 시간마다 조는 학생들입니다. 물론 강의 시간마다 엎드려 자는 학생들에 대해서는 솔직히 할 말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 강의가 정말 재밌고 유익하면 아무리 피곤해도 졸지 않을 테니까요. 그건 제 책임도 있으니 오늘 얘기에는 열외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결석이 많거나, 뒤에만 앉으려하거나, 지각을 자주하는 것은 전적인 학생들 문제 아니겠습니까? 결국은 그래서 얼마 전 한마디 했습니다. 물론 농담조로. “여러분이 강의 시간에 와서 앞자리는 텅 비워놓고 뒤에만 앉으려는 건 여러분의 자유다. 하지만 그 습관이 혹 여러분의 운명이 되진 않을까 걱정은 된다. 앞으로 사회에 나가서까지 늘 남의 뒤통수만 보고 따라가는 사람이 되면 안되지 않겠는가? 그러니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앞서가는 리더가 되기 원한다면 이 강의 시간부터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앞자리에 앉아보는 연습을 하라.” “결석 많은 학생들에게도 권한다. 내가 스스로 원해서 수강 신청한 과목인데도 이렇게 배울 기회를 스스로 놓아버린다면, 앞으로 여러분 인생에 찾아올 다른 좋은 기회들도 놓칠 수 있다. 교수가 이름을 부를 때마다 자주 대답을 주지 않는 여러분! 앞으로도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좋은 기회를 주려고 이름을 부를 때에도 답하지 않을 참인가?” “지각을 자주하는 학생들에게도 권한다. 습관적 지각은 꼭 바빠서만은 아니다. 습관이 나빠서이다. 그러니 그 습관은 고쳐라. 늦는 것이 습관화되면 그 늦음이 여러분의 운명이 될 수도 있다. 강의 시간에 배우는 일부터 늦지 않아야 여러분의 꿈을 이루는 일 또한 지연되지 않는다.” 이 느닷없는 얘기를 여러분에게도 드리는 이유는 뭘까요? 예배 또한 마찬가지란 생각 때문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출석부에 적힌 여러분 이름을 부르실 때 “예”라고 답하지 못한다면, 앞으로도 누군가에게 축복의 기회를 주시려할 때 자주 답하지 않았던 이름임을 아시고 아예 여러분의 이름은 부르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또 오시더라도 늘 뒷자리만 좋아하시는 여러분. 물론 그 자리가 편하실 수는 있으나 하나님으로부터도 멀리 있고 싶은 마음이 아니시라면 때론 과감히 앞자리에도 앉아보시기를 바랍니다. 뒷자리에 앉아 앞에 앉은 다른 성도들이 다 받아먹고 남은 부스러기 은혜로도 물론 부족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어느 때는 앞에 앉아서 더 싱싱하고 풍성한 주의 은혜로 흠뻑 적셔보는 시간도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습관적으로 예배에 늦으시는 여러분. 특히 3부(12시)예배는 준비할 시간이 비교적 넉넉한데도 늦으시는 여러분. 오죽하면 프란체스코 교황까지 나서서 “미사에 얼마나 더 늦어도 되는지를 계산하지 말라” 했을까요? 주일은 다른 일보다 예배가 우선 되어야 함은 성도의 기본 의무이니, 가급적 예배 전 분주하고 바쁜 일은 삼가시기 바랍니다. 혹 그러다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기도 응답마저 늦어질까 염려되니 적어도 10분전 찬양 시작 시간까지는 예배당 안으로 입장 완료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여러분의 꿈도 기도도 다른 사람보다 앞서서 응답하시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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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미소 속에 감춘 눈물
가슴이 아프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이 말이 꼭 그런 뜻은 아닐진대, 아무튼 보이는 미소 속에 숨겨둔 눈물의 양이 그만큼이나 많았다니... 결국은 알아버린 내 마음이 참으로 슬프다. 그동안 얼마나 고민이 많았을까? 아픔이 컸을까?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구하는 기도는 또 얼마나 드렸을까? “한나의 눈물을 받으시고, 히스기야의 아픔을 받으신 하나님이시라면 나의 아픔과 눈물도 받아 달라”는 기도는 매일 부르는 애절한영혼의 소야곡이었을 터. 남들 앞에서는 가벼운 척했지만 그들이 실제로 진 슬픔의 무게는 바윗돌보다 무거웠을 터. 웃음으로 덮고 지냈던 낮의 눈물을 밤에야 꺼내며 살았던 지난 세월은 하루도 천년 같았을 터. 그럼에도 이렇게 견디고 버텨왔다니 참으로 대단하다. 정말 신앙이라도 붙잡아주지 않았다면 어쩔 뻔 했나? 하여 미안하기도 하다. 주변에 누군가라도 그 말 못할 사정 알아차리고 위로자가 되어주었더라면 그나마 나았으련만, 누군가라도 중재자가 되어주었더라면 이렇게까지 커지진 않았으련만 무엇이 바쁘다고 우리 곁 이웃임에도 몰라주었는지... 옆집은 있어도 이웃은 없다는 말처럼, 이 삭막한 현대사회의 치부가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도 있었음이 송구하다. 이로써 사람은 보이는 모습이 전부가 아님을 또 깨닫는다. 말하는 것 또한 전부가 아님도 깨닫는다. 페이스북으로 근황을 훔쳐보고, 카톡으로 소식을 아는 것조차 그 사람의 요즘 삶 전부는 아니다. 심지어 매주 주일예배에 말쑥하게 차려입고 나와 너무나 은혜롭게예배를 드려도 그 사람의 속사정은 우리가 보는 것,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함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고보니 지난 수요일과 목요일 새벽기도회에서 설교했던 시편 137편, 138편 말씀이 다시 떠오른다, 137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강가에서 잃어버린 고향 예루살렘을 향하여 눈물로 드린 기도다. 당시 바벨론 강가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로서 화려한 문명을 꽃피웠다. 그러니 그들도 그 혜택은 보며 살았으리. 신분은 노예였지만 생활의 궁핍은 별로 없었으리라. 허나 그렇다고 해서 그 마음까지 기쁘진 않았을 터.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는 구절에 그들의 속사정이 드러나 있다. 게다가 바벨론 사람들은 술을 마시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 때 드리는 찬양을 풍악으로 울려보라며 조롱도 했단다. 그러니 이런 모욕이 또 어디 있으리. 그래서 그들은 차라리 그럴 바에야 우리의 수금을 바벨론 강변 버드나무에 걸어버리겠단다. 차라리 내 손이 악기 연주하는 재주를 잊어버리고, 차라리 내 혀가 노래하지 못하도록 입천장에 달라붙었으면 좋겠단다. 그 상한 자존심과 극한 절망에 몸서리쳤을 그들의 형편이 묵상된다. 시편 138편의 다윗의 시 역시 그러하다. 다윗은 왕이었고 엄청난 부와 권력을 누렸다. 그의 말 한마디로 천하를 호령하는 남 부러운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남모를 아픔은 있었다. 환난들이 있었고, 원수들의 분노가 있었다. 자식들은 서로 다투었고, 가까운 신하들마저 배신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보였던 다윗에겐 의외의 남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렇다면 다윗은 이 상황을 어찌 견뎠을까? 바벨론 강변 이스라엘 백성들 또한 그 절망을 어찌 극복했을까? 바로 ‘기억’이다. 그리고 ‘기도’다. 더 나아가 ‘기대’다. 이미 베푸셨던 하나님 은혜에 대한 기억. 그것을 다시 떠올리는 것이다. 지난 세월, 주께서 내게 베푸셨던 수많은 은혜들이 분명 있을 테니까. 그것부터 다시 붙잡고 감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도하는 것이다. 나를 잊지 말아달라고, 살펴달라고, 붙잡아달라고, 강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대하는 것이다. 살아나게 하시고 구원해주실 날을 소망하는 것이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날, 이 모든 것을 간증되게 하실 날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면 어느 새 슬픔은 물러가고 주의 위로가 임한다. 칠흑 같은 어둠은 지나고 찬란한 새벽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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