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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3·1운동 100주년에 새겨보는 최재형(崔在亨) 선생 조회수 : 1483
  작성자 : 김종훈 작성일 : 2019-03-02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뉴스를 검색하다 반가운 소식 하나를 만났다. 그것은 바로 오랜 세월 해외에 흩어져 살아온 독립유공자 후손 39명에 대해 마침내 우리 법무부가 대한민국 국적을 부여하는 행사를 가졌다는 소식이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최재형(1858.1.20.~1920.4.7.) 선생의 손자 최발렌틴 씨도 포함되었음에는 정말 반가운 마음 금할 길 없다.

지금이야 이 최재형 선생에 대한 보도가 많아졌다만, 사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그의 존재감은 참으로 미미했다나 역시도 최근 블라디보스톡을 방문해 보기 전까진 몰랐다. 막말로 19091026일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한 사실은 알아도, 그것이 가능하도록 막후에서 지원하고, 그 손에 그 총을 직접 쥐어준 이가 최재형 선생이었음을 아는 이는 과연 얼마나 될까? 

물론 이에는 안중근 의사를 체포한 일본이 집요하게 그 배후를 물었을 때 모든 것은 나 혼자서 기획했다며 끝까지 최재형 선생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던 이유도 있다. 그렇다면 왜 안중근은 그랬을까? 그에게도 최재형 선생은 우리 독립운동사에 없어서는 안될 대부(代父)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아시는 대로 최재형은 원래 함경북도 경원군에서 노비 아버지와 기생 어머니에게서 출생한 천민의 자식이다. 그래서 너무나 살기 힘들어 11살 때 가출을 결심하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근처 포시에트 항구까지 와서 어느 바닥에 쓰러진다.

그러자 마침 지나던 러시아 상선의 선장 부부가 그를 발견하고는 양아들로 입적한다. 정말 큰 은혜다. 이에 최재형은 그 아버지를 따라 세계 일주도 하며 세상 문물을 익히게 되고, 돌아와서는 러시아어도 완벽히 배워, 당시 돈을 벌려 블라디보스톡으로 몰려 온 한인노동자들의 통역관으로서의 입지도 굳혀나간다. 뿐만 아니라 공무원으로서도 출세하여 군수에까지 올라 러시아 정부의 두터운 신임도 받는다. 게다가 러시아의 극동진출 정책으로 대규모 군대가 블라디보스톡에 주둔하게 되자 그 군납업까지도 최재형이 맡는다. 그래서 그는 엄청난 돈을 벌어들인다. 그러니 이제야말로 그는 그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 평생 먹고도 남을 재산가로서 남부럽지 않은 편안한 삶을 살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 안주하지 않는다. 이제 본격적으로 그가 하고 싶었던 일, 해야만 했던 일을 시작한다. 그리하여 한인노동자들에게 일감을 주어 잘 살게 하는 것을 넘어, 그 자녀들을 위한 학교도 30개나 지어 교육에 힘쓴다. 배워야만 우리 민족이 가난과 압제를 벗을 수 있음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한인들은 최재형의 그 노블레스오블리쥬를 진심으로 존경할 수밖에. 급기야 집집마다 그의 초상화까지도 걸어둘 정도였고, 그의 별명 또한 '최페치카'('러시아 난로'처럼 따뜻한 사람)로 부를 정도였다.

그뿐 아니다. 그가 러일전쟁에 통역장교로 참가하면서 본 일본의 만행이 우리나라에까지 미쳐 고종을 폐위시키고 군대까지 해산한 것을 알게 되면서는, 급기야 남은 인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도 바치리라 결심한다. 그래서 연해주로 몰려 온 독립투사들을 만나 '동의회'를 조직해 본격적인 항일투쟁에 나서고, '대동공보'를 발행해 일본의 만행을 만방에 알린다. 이에 최재형은 그 모든 자금을 아낌없이 지원한다. 지금까지 자신이 출세하고 돈 번 목적이 모두 이를 위함이었음을 분명히 한다. 

하지만 이를 안 일본은 러시아를 압박해 최재형에게 제재를 가하기 시작하고, 결국 자금줄까지 끊게 하면서, 19204월에는 직접 최재형을 찾아와 체포해 처형시키고, 그 가족과 자녀들마저도 거의 다 죽인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 이 때문에 더 우리가 최재형 선생을 모르고 지냈는지도 모른다. 

그러고보면 최재형 선생은 현대판 모세 같은 분이다. 독립에 위대한 공을 세우고서도 그 독립을 보진 못하신 분. 얼마든지 혼자 나 몰라라 하고 잘 살 수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을 다 바쳐 민족 구하는 일에 앞장서신 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분의 무덤조차 모르고 있었으니, 이 역시 모세를 닮았다. 게다가 그는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다지 않은가? 그래서 더욱 '최재형'은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새겨야 할 소중한 이름이다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잘 살고 높아질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어야 함을 똑똑히 가르쳐준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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