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나라를 위한 걱정과 기도 | 조회수 : 997 |
작성자 : 김종훈 | 작성일 : 2017-03-17 |
나라가 심히 걱정된다. 솔직히 이 정도 걱정은 전에도 없었다. 유례없는 내우(內憂)에 외환(外患)까지 겹친 이 나라. 그렇다고 이를 타개해나갈 지도자도 없는 이 나라. 보수와 진보로 이념도 두 쪽으로 분열되었고, 외교 역시 미국과 중국 두 진영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으니, 당면한 문제만으로도 이미 엎친데 덮쳤는데, 미래마저 산 넘어 산이니 이를 어쩌면 좋으랴. 더 나은 미래를 향한 진통쯤으로만 여기기에는 상황이 너무 암울하다.
그래서 지난 한 주 우리교회는 ‘긴급새벽기도회’란 이름으로 모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기도뿐이라 그랬다. 그게 힘이란 믿음 때문에 그랬다. 물론 나 하나 기도한다고 뭐가 달라지랴. 우리 교인 몇백명이 새벽마다 기도한다고 뭐가 달라지랴마는 그래도 나 한 사람의 기도라도 진지하게 들어주시는 하나님이 계시고, 그 분이 움직이시면 이 나라에도 다시 희망의 빛이 비취리라 믿어서였다.
그렇게 한 주간을 보내고 나니 너무 잘했다 생각된다. 새벽마다 전했던 메시지들도 정말 필요했었다고 자평한다. 더 많은 성도들이 그 메시지를 붙들고 기도했더라면 좋았겠다만 그 정도만이라도 만족한다. 기도의 응답은 많은 숫자에 있기보다 더 큰 간절함에 있으니까.
그래서 다시 이 지면을 통해 말씀드리고자 한다. 혹, 참여하지 못하셨더라도 이 메시지라도 붙들고 개인적으로라도 기도를 계속 이어가 주시기를 바란다.
첫째, 잊지 말자. 이 나라 대한민국이 어떻게 탄생한 나라이며, 이 나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들이 있었는지부터 제발 잊지 말자. 몇 년 전 제암리교회 기념관에 가서 본 글귀는 지금도 선하다.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 그렇다. 23명의 제암리 주민을 무참히 살상한 일본의 만행을 두고 용서는 할 수 있지만, 그 사실 자체를 잊어버린다면 그 분들에 대한 도리도 아닐뿐더러 우리의 지금 사명도 흐려질 것이다.
둘째, 나라가 있고 내가 있음을 알자. 1936년 8월 9일 베를린올림픽에서 흘린 故 손기정 선수의 눈물을 아는가? 올림픽의 꽃 마라톤의 금메달이라는 영광스런 자리에 올랐으면서도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가 올라가는 걸 보아야 했고, 애국가가 아닌 일본의 기미가요를 들어야만 했던 그의 설움. 그게 바로 나라 없는 설움이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누리는 부유함과 성공과 꿈도 모두 나라가 든든할 때만 보장됨을 알자. 그렇게 본다면 ‘자녀를 위한 다니엘특별새벽기도회’ 같은 때보다 ‘나라를 위한 새벽기도회’가 어쩌면 더 중요했을 수도 있다. 나라는 잘되는데 개인이 불행한 것도 문제지만, ‘나라가 어떻게 되든 말든 개인만 문제없으면 된다’는 생각은 더 큰 문제이기 때문이다.
셋째, 회개하자. 회개는 성도만이 가진 트레이드마크(trademark)다. 정치인이나 지도자가 맘엔 안 들더라도 비난만 하지 말고 기도하자. 혹 내 잘못은 없었는지도 돌아보자. 느헤미야를 보라. 그는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자기 민족의 아픔을 보고 자기 죄인양 여겼다. 그 겸손한 자세로부터 그의 대담한 애국 행동은 시작되었다.
넷째, 기도하자. 우선 이 땅에 분열의 영이 떠나가도록 기도하자. 나라를 두 쪽 내는 일에 지도자나 언론들이 더 이상 선동하지 않도록 기도하자. 국민들 또한 더 이상 광장으로 나오지 말고 각자 삶의 위치에서 중심을 잡도록 기도하자. 우리는 순수한 마음으로 광장에 나가지만 그것을 다르게 이용하려는 세력들도 있을 수 있으니까. 특히 지도자는 너무 중요하다. 높은 지위에 있는 이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백성의 경건과 단정과 고요와 평안이 좌우된다(딤전 2:2). 대선(大選)도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꼭 이 나라에 다윗 같고 바울 같은 위대한 지도자가 세워지도록 기도하자. 다윗에게 자리를 내어준 요나단처럼, 바울에게 자리를 내어준 바나바처럼 자신의 영광보다 나라를 더 생각하는 겸손한 지도자가 많아지도록 기도하자. 뽑아도 그런 사람을 뽑자. 그것이 성도가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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