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5 단기선교(2) - 집시에 대하여 | 조회수 : 1041 |
작성자 : 담임목사 | 작성일 : 2015-07-02 |
집시(Gypsy), 그 이름에 대하여 내가 그동안 알고 있었던 상식은 그저 쿠르드족이나 베드윈족들처럼 일정한 거처도 없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유랑민족이라는 정도였다. 거기다가 구걸과 도적질, 높은 문맹률과 문란한 성생활로 인해 그 어느 나라에서도 이래저래 대접 못받고 사는 종족이라는 정도였다.
얼마 전 뉴스에선 프랑스 남부의 어느 버스회사가 그런 집시들을 승차거부한다는 보도도 있었다. 불결한 생활습관으로 몸에 밴 냄새가 너무나 지독해서 다른 승객들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이라는 거였는데, 거기다 전염성마저 있다는 소문까지 더해지면서 이를 두고 애꿎은 피해자 보호를 위한 '정당한 결정'이라는 주장과 '또 다른 인종차별'이라는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 하지만 결국 그들이 이런 취급을 받는 건 자업자득이라는 게 더 우세한 여론이 되었다.
그러니 옛날 유태인들이 독일 나찌에 의해 '인종청소'라는 이름으로 사람 취급 못받을 때, 그때도 함께 도매급으로 당하더니 지금도 여전한 셈이다. 유태인들이야 나중엔 선량한 희생자, 억울한 희생자로 그려져 지금은 독일 정부로부터 시도때도 없이 사과를 받아내고 있지만, 집시들은 그렇지도 못하다. 그런 취급을 받아도 여전히 싸다는 인식뿐이다.
그래서 집시는 더 불쌍하다. 숫자로도 전세계 2,000만명이나 되고 유럽에만 600만명 가깝게 살지만 여태껏 그 어떤 주류사회에도 들어와보지 못했다. 그 풍요로운 유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가난의 대물림만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일까? 리스트의 '헝가리광시곡'을 들어보면 그 표면적 흥겨움 속에 밴 이면적 슬픔과 우울이 보인다. 그래서 더 평안을 향한 갈망이 보인다.
얼마 전 '꽃보다 할배'라는 TV 프로그램에서 스페인 집시들의 춤을 접한 할배들 모습이 그려졌다. 그 모습을 본 이순재 씨가 '저것은 흥겨워 추는 춤이 아니라 그간 설움 받으며 눌려 지낸 세월의 분출'이라고 평했던데, 백번 맞는 말이다.
그러니 누가 그런 삶을 원할까? 대대로 물려받은 저주에, 열악한 환경마저 겹치는 바람에 그랬겠지. 그 옛날 그들의 조상들이 고향 인도의 북서부 지역을 왠지 모를 이유로 떠나올 때부터 그 어디서도 환영 못받고 마음 못잡은 이유에서였겠지. 알고보면 다 불쌍한 사람들일 뿐.
그래서일까? 이번 단기선교를 통해 헝가리 미슈콜츠(Miskolc)의 락(Lak)과 볼드바(Boldva) 마을에서 만난 집시들 눈망울도 그래보였다. 누구도 찾아와주지 않는 지역에 웬 사람들이 대거 들이닥친 것에 대한 신기함, 낯선 손님이 악수를 청하며 내미는 손에 대한 어색함, 그럼에도 선물꾸러미까지 잔뜩 들고서 그 먼길 찾아와 준 이들에 대한 숨길 수없는 고마움이 보였다. 그렇게 모질게 배척할만큼 나쁘게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예배 모습은 우리를 부끄럽게 했다. 그들의 찬양은 차라리 절규였다. '호산나 호산나', 우리도 수없이 불렀던 그 찬양이 그들에겐 진정 "여호와여 우릴 구원하소서"였다. 말씀을 받는 자세 역시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온, 딱 그 모습이었다. 역시 복음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의 것이었다. 빵과 돈과 옷과 집은 어디까지나 '필요조건'일 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만이 저들의 '충분조건'임이 또 한번 확인되었다.
함께 우리 팀과 동행했던 어느 목사님의 인사말이 마음에 남는다.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는 '부다'와 '페스트'라는 지역이 다뉴브강을 사이에 두고 한참 교류가 없다가 '체인교'(Chain Bridge)라는 다리가 건설되면서 비로소 '부다페스트'가 되었듯이, 누군가 이들에게도 세상으로 나가는 다리가 되어준다면 이들도 희망이 있다. 복음이 바로 그 다리이다"는 말씀. 너무 맞는 말씀이다.
왜? 이 복음이야말로 차별의 벽을 뚫고, 환경의 강을 건너고, 물려받은 저주의 산을 넘는 참 능력이니까... 그러니 우리도 다시 이 복음의 가능성을 믿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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