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곤한 주간' 특새 | 조회수 : 1096 |
작성자 : 김종훈 | 작성일 : 2018-03-31 |
저의 이번 '고난주간'은 정말 ‘곤한 주간’이었습니다. 4시에 알람을 맞추고 잠은 들었지만, 실제로는 월요일엔 2:40, 화요일 수요일은 3:40, 목요일은 3:20, 금요일 또한 3:30에 깨버렸으니 그것부터가 곤한 한 주의 시작이었습니다.
게다가 새벽기도 이후도 쉬질 못했습니다. ‘성도들도 새벽기도하고 바로 직장 가는데 나도 그래야지 않겠는가’하는 마음에 저도 그냥 목양실로 올라가 무조건 버텼습니다. 거기다 낮에도 이런 저런 만남들과 궐동 세교 식구들의 심방이 이어졌습니다. 물론 성경공부도, 학교 강의도 있었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참 열심히 보냈습니다.
그래서 화요일 밤엔 너무 피곤해서 작정하고 9시쯤 잠을 청하려 누웠습니다. 그런데 몇 년 만에 난데없이 걸려온 친구의 긴 전화 까닭에 1시간이나 넘는 시간을 또 버텼습니다. 목요일 밤에는 정말로 작정하고 10시가 조금 넘어 누웠는데, 그날 따라 왜 또 그렇게 잠은 안 오는지. 엄청 피곤은 한데. 그러다 12시가 넘어서야 잠이 들었나 봅니다. 그래서 이래저래 ‘고난주간’은 ‘곤한 주간’이 되어버렸습니다. 물론 우리 성도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게다가 말씀 준비까지도 이번엔 씨름이었습니다. 단순히 설교 준비로서의 어려움만이 아닌, 말씀 주제 하나하나가 제게 주는 도전이 너무 컸습니다. 매일 하나씩 묵상해 본 빌라도, 바라바, 강도, 군병들, 지도자들, 무리들... 그 모두가 다 내 모습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빌라도. 그는 '절대진리'는 외면하고 '상황논리'에만 함몰되어 무죄한 예수를 죽게 합니다. 자기 자리를 잃을까하는 두려움에 자기 양심까지도 팝니다. “사람을 좋게 하랴 하나님을 좋게 하랴.” 이에 저도 많이 찔렸습니다.
바라바. 그는 완전 죽을 목숨이었으나 예수님 때문에 극적으로 살아난 사람입니다. ‘사람 아버지의 아들’(바라바)을 하나님의 아들이 살립니다. 그런데도 은혜를 모르고 마치 자기가 꽤 괜찮은 사람이어서, 예수님보다 더 나아서 석방된 줄로 착각합니다. 이에도 많이 찔렸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강도. 그는 다른 강도와 동일한 기회를 얻었으나 그 소중한 기회를 눈앞에서 놓쳐버립니다. 진리에 귀 기울이기보다 사람들 말을 더 의지하다가, 자기를 돌아보거나 자신을 의탁하지 못하고 세상만 원망하다가 그 꼴이 됩니다. 역시 많이 찔렸습니다.
군병들. 그들은 빌라도의 권세를 등에 업고 완장 찬 이들의 전형적인 갑질 행세를 한 사람들입니다. 이미도 엄청난 채찍에 맞아 만신창이가 된 예수님이 저항할 수 없는 상태임을 알고도 그 약함을 이용하여 자기들 기분 풀이로만 여깁니다. 바로 그런 말도 안되는 희롱을 보는데, 어쩌면 지금도 이 시대에 만연할 수 있는 주님을 향한 희롱, 복음을 향한 희롱이 생각나 ‘난 대체 이에 무엇을 하고 있는가?' 되물어졌습니다. 그 예수님의 희롱 당하심으로 나를 부끄러움에서 건져주신 하나님께는 또 얼마나 감사해하는지도 물었습니다. 주님의 아픔이 날 고치시고 주님의 죽음이 날 살리셨듯, 주님의 희롱이 날 세우셨음을 다시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지도자들. 그들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는 결국 자신들의 영역이 침범 받고 비판 받았던 것 때문입니다. 오히려 예수님 보시기에는 그들의 순수하지 못함이 더 심판받아 마땅했는데도 말입니다. 이 또한 저는 찔렸습니다.
무리들 역시 무조건 요구만 하고, 전례만을 주장하고, 충동을 못 이기고, 소리를 지르며, 자기만족만을 내세우다 예수님을 죽입니다. 그도 내 모습 같아 찔렸습니다.
이렇게 지난 ‘고난 주간’은 이래저래 육적으로도 영적으로도 ‘곤한 주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의미는 더 깊었던 것 같아 감사한 한 주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주께 영광 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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