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말씀은 ‘거울’, 기도는 ‘저울’ | 조회수 : 1332 |
작성자 : 김종훈 | 작성일 : 2019-02-08 |
지난 주 설교의 결론으로 전했던 딤전 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는 성구를 좀 더 묵상해보자. 나 역시도 이 말씀처럼, 우리의 거룩이 의식적 거룩, 신분적 거룩, 은사적 거룩, 고립적 거룩이 아닌 일상의 거룩이 되게 하는 힘은 오직 말씀과 기도에 있음을 믿는다.
말씀과 기도가 부재된 삶으로 어찌 거룩을 지켜낼까? 세상은 생각보다 악하고, 생각보다 더러운데... 세상은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도 모르게 날 오염시키는데.... 그러니 그로부터 성도됨을 지켜주는 강력한 장치는 절대 필요한바, 그것이 바로 말씀과 기도라는 데에는 토달일이 없다.
그렇다면 이 말씀과 기도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우리의 거룩을 지키는 강력한 힘일까? 아마도 이는 말씀만이 나를 제대로 비춰주는 투명한 거울이기 때문일 것이다. 거울은 나의 예쁘고 단정한 용모를 위해 매일같이 들여다보고 비춰보는 필수 도구. 따라서 거울에 자신을 자주 비춰보는 사람일수록 용모에 관심 많은 사람이다. 확실히 그런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용모가 단정하다. 거울을 볼 때마다 계속 자신을 고쳐가기 때문이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흐트러진 모습을 보고서도 고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그렇다면 영적 용모에 관심 많은 사람도 마찬가지. 말씀 역시 내 영혼을 비추는 거울이기에, 말씀 앞에 서면 내가 훤히 들여다보인다. 그 앞에 서면 나의 부족과 불신앙, 나태함과 못남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러니 어찌 그것을 보고서도 고치지 않을 배짱이 있을까?
종교개혁자 칼빈은 그의 저서 ‘기독교강요’(Christianae Religionis Institutio)에서 “인간에겐 두 가지 앎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나를 아는 것인데, 이 두 가지 앎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도 했다. “나를 알 때 하나님도 알고, 하나님을 알 때 나도 안다”는 것. “하나님을 모르면 나도 모르고, 나를 모르면 하나님도 모른다”는 것. 그런 점에서라도 말씀만큼 나를 정확히 비춰주고 알려주는 도구는 없다.
그렇게 매일 말씀으로 자신을 비춰보라. 어찌 나태하고 교만할 수 있으리. 날마다 드러나는 나의 부족 앞에서 오직 하나님만 붙들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면서 또한 거룩해지리라.
또 기도는 저울이기 때문이다. 이는 기도를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 ‘히트파렐’에서 발견했다. 이는 ‘저울에 나를 달아보다’는 뜻인데, 기도의 뜻에 이런 뜻도 있음은 참으로 놀랍다. 기도는 나의 부족을 채우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나의 부족을 달아보는 도구이기도 하다는 것. 아, 그래서 예수님도 세리의 기도를 칭찬하셨나보다.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 그러니 어찌 그 정확한 저울을 속일 수 있으리.
그런데도 가만 보면 사람은 자기 문제를 놓고도 남 탓, 세상 탓으로만 돌리려한다. 그럼으로써 자기에게 날아올 화살을 미연에 차단해버린다. 자신의 부족을 비겁하게 감춘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가당찮다. 기도는 자기부터 저울에 달아보는 시간이기에 자신의 흠과 티, 자기 눈의 들보가 먼저 보여야 맞다.
다니엘 시대에 벨사살 왕이 잔치하면서 보았다는 벽글씨 ‘메네메네데겔우바르신’. 여기에 유독 ‘데겔’이란 말이 눈에 띈다. 이 또한 ‘저울에 달아보니 부족함이 보인다’는 아람어이다. 그러니 벨사살 그도 일찍이 다니엘 말을 듣고 겸손한 기도로 마음을 낮추고, 하나님을 높였다면 그날 잔치에서 비명횡사하는 불행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 매일의 기도로 나를 하나님의 저울에 올려놓자. 그러면 늘 믿음은 모자라고, 늘 죄는 넘친다. 그것이 보여야 믿음은 채우고, 죄는 덜어낸다. 그러면서 우린 또 거룩해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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