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흰머리의 미학(美學) | 조회수 : 875 |
작성자 : 김종훈 | 작성일 : 2020-05-15 |
내가 몸살 기운이 있어 동네병원을 찾았다가 진료실 앞에서 기다리던 중, 데스크의 간호사로부터 “아버님 들어가세요”라는 소리를 듣고 첫 충격을 받았던 때는 세교성전 입당 후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러니 족히 9년은 넘은 것 같다.
아니 도대체 그 간호사는 날 뭘로 보고 ‘아버님’이라 했을까? 난 그 간호사 같은 며느리를 둔 일이 없는데... 아직 사위 볼 날도 멀었는데... 그래봐야 내 나이 40대 중반이었는데... 그냥 "000님" "선생님" "환자분"이라 해도 될 것을 왜 굳이... 그래서 한번 따질까도 싶었지만 억지로 참았다. 하여간 그때 그 간호사가 던진 한마디로 내 몸살 기운은 더 심해졌다.
게다가 그 말은 그 일이 있기 얼마 전, 주일예배 때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함께 탄 어느 성도가 “어머, 이제 목사님도 흰머리가 보여요”란 말에 이미 비슷한 충격을 한번 받은 상태였다. 물론 “예배당 짓느라 많이 힘드셨나봐요”라고 금방 위로의 말씀으로 수습은 하셨지만, 그래도 내겐 그 뒷말보다 앞말이 더 남았었다.
그랬던 내가, 10년이 지난 지금. 지금은 이 현실을 너무 잘 받아들이고 있다. 이젠 내 머리 얘기를 누가 해도 끄떡없다. “아 그래요?”로 응수한다. ‘중후해 보인다’는 의미로 재해석해버린다. 어딜 가서 “아버님” 소리를 들어도 괜찮다. ‘푸근해보인다’는 의미로 재해석해버린다.
왜 이렇게 생각이 바뀌었냐고? 물론 나이도 그만큼 더 먹어서이다. 또 불가항력적인 건 빨리 받아들여야 마음도 편해서이다. 게다가 최근엔 ‘사람의 백발이 신비로운 신체작용’이라는 것도 알게되어서이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백발(白髮)은 병적인 이유를 제외하고는 인체가 에너지를 절약하는 차원에서 취하는 고마운 표시란다. 다시 말해 신체의 다른 부분을 젊게 유지시켜 주려고 머리털을 대신 노화시킨다는 원리다. 사람은 에너지 소모가 격렬해질 경우, 그것을 어디선가 보충을 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되면 불필요한 세포 분열을 하게 된단다. 그래서 신체의 어느 부분을 희생시켜서라도 그걸 막아보려 애쓰게 되는데, 그중 하나가 머리카락을 희게 만드는 거란 얘기다. 그러니 백발은 나의 노화를 조금이라도 줄여주기 위한 희생의 발로인 셈이다. 캬~ 이런 고마울 데가...
게다가 성경도 “백발은 늙은 자의 아름다움”(잠 20:29)이라 하지 않았나? “영화의 면류관”(잠 16:31)이라 하지 않았나? 고로 백발을 가졌다는 건 장차 받을 면류관도 잘 준비되고 있음의 증거이다.
그래서 난, 안셀름 그륀(Anselm Grun)이 ‘황혼의 미학’에서 ‘나이 드는 기술’에 대해 말한 것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는 첫째, ‘받아들이는 것’이 나이 드는 기술이라 했다. 즉, 신체의 변화를 굳이 외면하거나 감추지 않는 것. 그렇게 한계를 인정하고, 과거와도 화해하고, 고독을 다루는 법도 익혀가는 것이라 했다.
둘째는 ‘놓아버리는 것’이라 했다. 가진 것에 집착 말고, 관계에 느긋해지는 것. 성(性)에서 자유로워지고, 권력도 내려놓는 것. 왕년에 내가 어떤 사람이었건 그 과거의 영광과는 거리를 두고, 섭섭함도 내려놓는 것. 재산이나 지위 또한 ‘없어졌다’ 여기지 말고, ‘물려줬다’ 여기는 것. 왜? 나도 젊었을 때 누군가가 물려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살았을 테니까.
셋째는 ‘넘어서는 것’이라 했다. 자아를 버리고, 나보다 더 큰 어떤 것에 마음을 여는 것. 나의 공간을 비워 하나님으로 채우는 것. ‘추월’이 아닌 ‘초월’의 삶을 사는 것이라 했다. 정말 지혜롭고 깊은 통찰이다.
그러니 혹 당신에게도 ‘백발’(白髮)이 시작되었다면, 감사하고 받아들이고 놓아버리고 넘어서라. 거기에 ‘선량함’과 ‘부드러움’, ‘너그러움’과 ‘침묵’, ‘내적 고요’와 ‘하나님과의 일치’까지 더해간다면, 당신의 백발은 더없이 찬란하고 아름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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