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아히도벨과 요셉 | 조회수 : 1136 |
작성자 : 김종훈 | 작성일 : 2020-08-09 |
요즘 ‘시편과 함께 하는 153 감사대행진’ 덕에 다윗이란 사람의 인생에 푹 빠져있노라니 여러 면에서 그가 참 측은하다는 생각부터 든다. 물론 그에게도 영광스런 장면이 없진 않았다. 말째의 설움에도 왕으로서 기름부음도 받고, 골리앗도 물리치고, 결국은 왕이 되어 나라도 잘 다스렸고,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지금도 칭송을 받고 있음은 참 부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의 인생을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그런 영광 뒤에는 형언할 수 없는 쓰라린 고통 또한 있었다. 이새의 첩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 친어머니가 돌아가신 불행부터 시작하여, 아버지 집에 들어가 받았던 서자(庶子)로서의 설움들, 이스라엘의 천적 골리앗을 단번에 때려잡은 것이 오히려 화근 되어 사울의 질투심만 유발하여 10년을 넘게 도망 다녔던 세월들, 그렇게 또 우여곡절 끝에 왕은 되었으나 이번엔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다시 한번 동네 창피한 일을 당하며 또 정처 없이 아들놈에게 쫓겨 다녀야 했던 세월 들까지... 정말이지 이보다 더 파란만장한 삶이 있을까 싶다.
하지만 그 많은 고난들도 감당할 체력이나 젊음이 있으면 된다. 이길 수 있다. 하지만 그것도 나이가 들거나 건강이 받쳐주지 못하면 문제는 달라진다. 버티기가 힘들다.
딱 아히도벨의 배신이 그랬을 것 같다. 아히도벨은 수십년간 다윗과 지근거리에서 함께 했던 신하이다. 다윗은 그를 ‘내가 신뢰하여 자기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시 41:9)로까지 표현했다. 그 정도로 다윗은 그를 가족처럼 대했고, 많은 것을 스스럼없이 주고 받았다.
게다가 그는 제갈공명 같은 지략가이기도 했다. 삼하 16:23에는 아히도벨의 말을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았다”할 정도였다. 아무리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이런 표현을 사람에게 할 수 있나? 그만큼 그의 말은 청산유수(靑山流水)였고 지혜로운 말이었다.
그런데 그 아히도벨이 어느 날 다윗을 배반한 것이다. 압살롬에게로 붙어버렸다. 다윗에 관한 모든 정보를 다 가진 그가 적(敵)에게 가버린 것이다. 아마도 이는 다윗 인생에 가장 뼈아픈 순간이고, 모든 게 다 무너지는 순간이었을 게다. 다윗은 그래서 그 아픔을 시편 38,39,40,41편에서 읊었다.
참 안타깝다. 아니 그 좋은 머리로, 그 두터운 신뢰를 어떻게 그렇게 단번에 잘라 버리고 다윗을 등지나? 어떻게 그래서 복된 삶이 열리겠나? 봐라. 그렇게 다윗을 배반하고 압살롬에게 붙더니, 결국은 압살롬하고도 의견이 안 맞아 자살해버리지 않나?
그러니 그 지식과 그 지혜로 다윗을 보좌하며 끝까지 썼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다윗 또한 그를 존중하고 때론 지혜도 구하면서 참 멋지게 나라를 이끌 수 있었으리. 그래서 든 생각. 사람이 똑똑한 것을 잘못 쓰면 결국엔 끝이 안 좋을 수 있구나. 똑똑한 것도 선하게 의리있게 써야 하는구나.
그런 점에서 요셉은 참 훌륭하다. 그가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을 때, 파라오는 그를 ‘사브낫바네아’라고까지 별명 지어주었다. 이는 ‘세상의 구원자’ ‘신(神)의 대언자(代言者)’라는 뜻으로, 이 또한 아히도벨처럼 요셉의 말을 하나님 말씀처럼 왕도 들었단 얘긴데, 얼마나 요셉이 믿음직스러웠으면 그랬을까? 그래서 그 왕도 모든 것을 다 요셉에게 맡겨버린다.
그런데도 요셉은 아히도벨처럼 왕을 배신했다는 기록이 없음이 놀랍다. 그 지식과 지혜를 가지고 자기가 섬기던 왕을 어렵게 했다는 기사가 없다. 끝까지 겸손했고, 자기 직분에 충실했다. 참 훌륭하다.
그러고 보니 이 시대에는 똑똑한 게 전부인 세상은 아닌 듯하다. 얼마나 자신의 위치를 잘 지키며, 그 지혜를 끝까지 선한 데 쓰느냐가 더 중요하다.
이전글 : 변질(變質) | |
다음글 : JTBC 연속토론 “집단감염 진원지? 논란의 교회” 시청 후기 | |
이전글 다음글 | 목록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