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순교자 '문준경'(文俊卿) | 조회수 : 1102 |
작성자 : 김종훈 | 작성일 : 2016-01-22 |
문준경, 그녀는 과연 누구인가? 대체 누구길래 전라남도 신안의 아름다운 섬 증도(曾島)의 오늘을 더 아름답게 하는가? 700년 전 보물섬 신안 앞바다를 더 보물답게 하며, 우전해수욕장의 십리 은빛모래를 더 곱게 하며, 127미터 삼정봉 정상에서 바라보는 서해 낙조의 찬란함을 더 찬란하게 하는가?
난 그 이유를 이번에 목자부목자 수련회의 장소로 택하여 간 걸음에서 확인하였다. 1891년 2월, 전남 신안군 암태면 수곡리에서 태어난 한 여인, 소박한 한 가정의 행복을 꿈꾸며 열일곱의 앳된 나이에 시집을 갔지만, 이미 그 남편에겐 딴 여자가 있음을 첫날부터 알고는 서럽고 외로운 결혼생활만 20년. 물론 포기할까, 자살할까도 여러 번 생각했지만 그녀를 불쌍히 여겨 글이라도 가르쳐주려 하신 시아버지의 사랑이 고마워 지내다가, 그 시아버지 돌아가시고 삼년 상(喪)까지 다 치르고 나서야 그녀는 마침내 손재봉틀 하나 가지고 목포로 떠나게 된다.
바로 거기서 운명처럼 만나게 된 예수 그리스도. 우연히 참석하게 된 북교동교회 이성봉 목사님의 부흥집회에서 “시집살이하느라 한 맺힌 여인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소작살이 하느라 한맺힌 사람들아. 양반 상놈의 운명에서 한 맺힌 사람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는 말씀에 번개를 맞은 듯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고꾸라진다.
그렇게 그녀는 뜨거운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으로 기독교 신자가 된다. 그 후 그녀의 믿음은 수직 성장하여 경성성서학원의 신학생까지 되어 사역자로 준비되었고, 자신의 첫 사역지로 고향 신안을 다시 택한다. 여전히 소박 맞은 여인으로 친정 마을에서조차 박해가 심했고, 여전히 딴 살림 차려 자식까지 낳고 사는 남편의 방해가 있었지만, 그 모든 상처를 십자가의 사랑으로 승화시켜, 복음 증거의 사명으로 승화시킨 그녀는 1932년부터 신안군의 수 많은 섬들을 순회 전도하며 임자교회, 증동리교회, 대초리 교회를 세우고, 재원리, 방축리, 우전리에는 기도처를 세운다.
하지만 일제에 의해 교회는 강제 해산 당하고, 한국전쟁으로 인해 그녀마저 목포로 압송되면서 그녀의 전도 활동은 잠시 멈춘다. 하지만 1950년 9월 28일 국군의 수복으로 풀려나 그녀는 다시 증도로 돌아오게 되는데, 주변에선 “아직은 위험하다”며 말렸지만 그녀는 “교인들이 걱정된다”며 기어이 돌아와서는 공산당 잔당들에 의하여 총살 순교를 당한다.
그 후 그녀의 일화는 수 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세상에 알려진다. 신안의 많은 섬들을 순회하며 주민들 부탁으로 우체부의 역할도 기꺼이 해주었던 사람. 여러 섬들 왕래하느라 1년에 아홉 켤레나 고무신을 바꾸어 신어야만 했던 사람. 자신은 하루에 물 한 모금, 찐쌀 한 모금만 먹고 견디면서도 수 많은 섬 주민들의 고통을 들어주고 기도해주고, 모든 임산부의 산파 역할도 기꺼이 다 해내었던 사람. 심지어 전염병 장티푸스가 돌았을 때에도 “난 혼자 몸이니 죽어도 괜찮다”며 주저없이 그 환자들을 돌보고 기도해주었던 사람.
명실공히 그녀는 신안의 1004개 섬들의 진정한 천사였고, 의사이고 간호사였으며, 전도자이며, 목회자이며, 목민관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마흔의 나이부터 20년간, 신안에 6개 교회를 개척하고, 70명의 목회자를 길러냈으며, 증도의 경우 섬주민의 90%가 복음화 된 섬으로 열매 맺게 되었다는 얘기다.
그러니 이런 뜨거운 복음전도의 땀이 밴 증도에서 보낸 하룻밤이 우리 목자부목자들에게도 꽤 도전 되신 모양이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은 그 현장을 직접 본 그 감동 또한 꽤 크셨던 것 같다. 몸은 죽었으나 그가 전한 복음과 보여준 사랑은 여전히 죽지 않은 사람, 참으로 목회자인 나부터 따라가야 할 세상의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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